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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성인

주보성인 –

성 스타니슬라오(St Stanislaus of Cracow)

Sw_Stanislaw

  • 축일: 4월 11일
  • 신분: 주교, 순교자
  • 활동지역: 폴란드 크라쿠프 (Krakow)
  • 활동연도: 1030년 – 1079년
  • 성인전: 국가의 영광(The Gloria of the state)이라는 뜻을 가진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크라쿠프 교외 슈체파노프(Szczepanow)에서 출생해 그니에즈노(Gniezno)에서 수학한 뒤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설교가로서 곧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려고 애썼고, 교회 개혁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다.1072 년 그는 크라쿠프의 주교가 됐는데, 국왕 볼레수아프 2세(Boleslaw II)의 잔학성과 불의를 고발함으로써 왕과 적대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국왕을 파문하고 대성당의 출입을 저지하자 볼레수아프 왕은 크라쿠프 시외의 성 미카엘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그를 직접 끌어 내어 살해했다. 성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국민의 상징이다. 그는 1253년 9월 8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IV)에 의해 아시시(Assisi) 대성당에서 시성됐고,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돼 현재 공경을 받고 있다.시드니 대교구 한인 천주교회는 1976년 11월 4일 패딩턴 소재 세인트 아시시(St. Francis of Assisi)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면서 공동체가 설립, 시작됐다. 여러 번에 걸친 장소 이동 중 현 실버워터 지역에 있는 스타니슬라오 성당을 한인 공동체의 모 본당(1985년 3월 24일)으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스타니슬라오 성인을 자연히 본당 공동체의 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한국 순교성인(St Korean Martyrs)

St 103 Korean Martyrs

  • 축일: 9월 20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 기간: 1801년 (신유박해) – 1866년 (병인박해)까지 순교자
  • 성인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가톨릭 신앙이 전파된 것을 보면 대개 선교사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나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성령의 힘은 성실한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생활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한다. 극동 아시아의 조그마한 반도인 조선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것은 성실한 유학자들이 서적을 통해 학문을 연구한 끝에 스스로 입교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에 당신 성령의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의 섭리였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한문으로 쓴 성경과 교리서 또는 윤리와 신학 서적들이 그 당시의 외교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조선에 들어오게 됐고, 다른 많은 종교 서적들과 함께 읽히던 천주교회 서적들은 진리를 찾던 조선의 선량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이 되었다. 초기 공동체는 권철신과 이벽을 중심으로 한 젊은 양반 학자들의 학문적인 모임이었던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가 1779년경에는 천주교 신앙을 알고 실천하려는 모임이 됐다. 1783년 이승훈을 북경으로 파견,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북경 선교사에게서 교리(敎理)를 배우게 하고 영세를 받도록 했다. 첫 영세를 받아 신앙인이 된 이승훈은 그 이듬해 귀국해 동료들에게 세례를 주고, 이벽, 권일신, 정약용, 정약종 형제들과 함께 첫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하지만 성직자나 선교사가 없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급속도로 성장했으나 정치적 불안과 당파 싸움 및 교리(敎理)와 마찰을 일으킨 조선 사회와 문화, 정치 상황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았다. 1785년(을사추조적발사건), 형조의 우연한 검거에 의해 야기된 최초의 박해에 이어 크고 작은 박해들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에 따라 많은 선조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교우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1793년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1801년(신유박해)에 대부분의 교회 창설자들과 함께 순교했다. 목자 없는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1825년 로마 교황청에까지 그 어려움을 호소해 1831년에는 조선 교구가 설정됐다. 파리 외방 선교회가 이 나라의 선교를 담당하게 되어, 1835년부터 몇 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활동했으나 1839년(기해박해)에는 ‘사학(邪學) 퇴치령’에 따라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돼 엥베르 주교와 두명의 신부(모방,샤스탕)가 모두 순교했다. 1845년에는 이 땅에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목을 시작했으나 이듬해인 1846년 병오박해 때에 순교했다.서구 열강들이 극동 지방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던 19세기 말에는 국내외의 불안이 고조되고 정치가들의 쇄국 정책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1만여 명의 교우들이 학살됐고, 국내에서 활동하던 외국 성직자 십여 명이 순교하거나 추방됐다. 이렇게 100여 년에 걸친 박해로 적지 않은 교우들이 배교하기도 했으나 학자와 남자들 뿐 아니라 부녀자와 아이들 및 평민과 상인들까지도 신앙을 위해 용감하게 목숨을 바쳤다. 이 중에서 초기의 순교자들은 증거 자료 미비로 시복과 시성에서 누락됐으나 1839년부터 1849년까지의 순교자들 중 79명이 선택돼 1925년 7월 5일 복자품에 오르게 됐다. 그 후 다시 1866년의 병인박해때 순교한 24명이 1968년 10월 6일 시복돼 총 103명이 시복됐다. 이 103명의 순교 복자들은 한국선교 200년을 맞이해 1984년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에서 시성돼 성인품에 오르게 됐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정하상 바오로를 포함한 103위의 순교 성인들을 모시고 있다. 또한 2014년 8월 17일에는 내한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124위의 시복식이 있었다.한국 천주교회는 세계 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선교사 없이 평신도가 신앙을 직접 받아들여 자생, 성장한) 유일한 교회이다. 시드니 대교구 한인 천주교회는 순교 선열들의 이러한 신앙과 삶을 더욱 본받아 이 곳 호주 공동체에 뿌리내리면서 새 성전 건축 인준 당시(클런시 추기경, 1995년 9월 17일) 스타니슬라오 성인과 함께 한국 순교 성인들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